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만지로 (문단 편집) === 일본에서의 활동 ===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을 계속 유지하려 했으나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아편전쟁|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를 침략해 쑥대밭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후에는 미국이 일본을 타겟으로 무력 시위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쇄국은 무의미하며 서방 열강을 상대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인재]]를 모으기 시작한다. 만지로가 도사 번으로 돌아온지 4개월만인 [[1853년]], [[쿠로후네 사건]]이 발생하고, 만지로는 미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에도 막부]]에 불려갔다. 미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으며, 영어를 아는 유일한 일본인 만지로는 귀중한 존재였다. 유학자 오쓰키 이와케이는 "도사 표류인 만지로는 매우 [[천재]]끼가 있는 자. 이번 중견역 등에 기용되면 반드시 온편한 취급"을 할 수 있다고 막부에 추천했다.[[https://www.risktaisaku.com/articles/-/11639|#]] 그리고 여기서 로주[* 老中, 쇼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하는 직책.]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B2%A0_%EB%A7%88%EC%82%AC%ED%9E%88%EB%A1%9C_(1819%EB%85%84)|아베 마사히로]]와 접견하여, 미국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아베에게 미국이 오랫동안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고 알렸고, 미국 포경선이 규슈 남부, 사쓰마 번의 작은 섬 중 하나, 류큐 열도 중 하나에 땔감, 담수, 식량을 운반할 수 있는 항구를 개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관대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대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가 아베 마사히로에게 건넨 미국 정세 서술 보고서인 '존 만지로 수사기록'은 그가 일본 개방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느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NJOY20FEB202018202311620PHO20MANJIRO.png|width=100%]]}}} || || {{{#ffffff ''' ▲ 당시의 존 만지로''' }}} || 미국이 요구한 사항 제1조는 난파해서 표류해 온 선원을 보호하고, 항구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실제 미국의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만지로는 항구는 개방하지만 통상은 안해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과 미국 포경선에게 진 빚의 만분의 1을 마침내 갚을 수 있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막부는 이 의견을 검토해서 받아들였다. 이 공적으로 막부로부터 직참 [[하타모토]]의 벼슬을 얻으며 당시 기준으로 보면 신분을 뛰어넘는 엄청난 [[출세]]였다. 평민이라 성이 없었는데 고향 이름을 따와 나카하마라는 성씨를 칭했다. 이후 [[이즈]]의 니라야마다이칸쇼(韮山代官) 에가와 히데타츠(江川英龍)는 페리 제독이 다시 오는것에 대비해 만지로를 불러내 자신에게 배속시키도록 막부에 압력을 넣었다. 이 결과, 만지로는 '다이칸 에가와 타로자에몬[* 에가와 히데타츠의 통칭이다.]의 착수'를 명령받았다. 일개의 견습 어부의 소년으로부터 사분으로 발탁되어 고향에서 유래한 나카하마라고 하는 성을 따르게 된 청년을, 에가와는 전속의 통역관 겸 외교 고문으로서 활동시킬 생각으로 지도했다. 이후 [[미일화친조약]]에서는 [[통역사]]로 발탁됐지만, 애초에 전문 통역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외교 용어에 서툴렀다) 당시엔 [[미국]]의 [[스파이]] 아니냔 [[편견]][* 이 주장을 한 인물이 바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버지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역시 있었기에 [[페리 제독]]과의 직접 통역은 하지 못했다.[* 직접 통역은 미국인 [[https://en.wikipedia.org/wiki/Ranald_MacDonald|래널드 맥도날드]]에게 영어를 배우고, 네덜란드어 역관 집안의 자제인 [[https://ja.wikipedia.org/wiki/%E6%A3%AE%E5%B1%B1%E6%A0%84%E4%B9%8B%E5%8A%A9|모리야마 에이노스케]]가 했다.] 하지만 화친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린 장소의 옆방에서 모든 문서를 점검하고 번역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일본 최초의 영어 교본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일본 영어 교육의 [[기초]]가 되었다. 또 항해나 조선에 관한 각종 서양 기술서적들을 번역하거나 영어 교육, 강연 등을 했다. 당시 만지로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일본의 [[근대화]]에 공헌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얻은 지식을 사용하여 정부의 해군을 현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당시 일본이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로 한 것은 [[대선]](大船)을 갖춘 강력한 [[해군]]이었다. 1854년 5월, 막부가 주도하여 마스트 3본 형태에 용골(龍骨)을 갖춘 최초의 서양식 범선 호오마루(鳳凰丸)호를 건조했고, 이어서 증기선 건조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만지로가 조선(造船) 디자인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또한 막부 말기에 구입한 선박의 대부분이 4, 5년 만에 그 생명을 끝냈다. 원인은 밑에 나오는 간린마루의 태평양 횡단 당시 일본 선원이 그랬던 것처럼 악천후 시 조선기술의 미숙으로 많은 배가 좌초해 침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항해기술이나 조선기술은 점차 향상되어 [[러일전쟁]] 때에는 세계 수준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신속한 기술 향상을 실현할 수 있었냐면, 발전의 기초가 되는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존 만지로는 그 시스템 만들기에 크게 공헌했다. 만지로는 미국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현대 해양 항해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너새니얼 보디치(Nathaniel Bowditch)의 ‘미국 항해술 개설[* 1802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항해술의 교과서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미국 해군 함정에 탑재되어 있다.](The New American Practical Navigator)’을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얻었기에 귀국 후 이 책을 공들여 일본어로 번역했다. 이 책을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의 일본 항해사들은 항해술 교육 교과서로 삼았다. 이후 만지로의 재능을 눈여겨 본 에가와 타로자에몬의 니라야마주쿠와 막부의 해군훈련소에서 교수로 강의를 하게 된다. 이후 [[이즈]]의 헤다호에서 건조된 기미자와형 범선을 개조한 포경선과, 네덜란드로부터 구입한 포경선으로, [[오가사와라 제도]] 해역을 향해 포경 활동을 실시했다. 존 만지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가쓰 가이슈]],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비롯하여 훗날 일본 해군, 해운, 수산 발전을 담당한 많은 인물들이 그에게서 실천적인 해양 기술을 배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https://www.spf.org/opri/newsletter/458_3.html?latest=1|#]] 그러는 동안 막부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증기선을 도입하고 해군 운용에 관한 지식을 전수받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호의로 증기선 숨빙호(Soembing, 자바의 화산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후일 간코마루(觀光丸)로 개칭했다)를 선사하는 동시에 해군 교관단을 파견하여 해군 관련 지식을 교습해주기도 했다. 1857년에는 일본이 주문한 증기선 군함 야판(Japan)호와 제2차 교관단이 함께 들어왔다. 이 배는 3본 마스트에다가 외륜이 달린 목제 기선이었다. 기관(機關, 모터)은 항구를 드나들 때에만 사용하고, 항해할 때에는 돛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곧 이름을 ‘역경(易經)’에서 따온 ‘간린마루(咸臨丸)’로 바꾸었다. 막부는 1년 반의 1차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교관이 되어 다음 기수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군함교수소(軍艦敎授所)를 운용했다. 만지로는 이 곳에 교수로 등용됐으며 일본 해군 창설에 기여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근대 해군이 첫걸음을 뗐다.[[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9/28/MGAH6IGO4BGQDDIGUDMHKEFO3U/|#]] 또한 그가 지휘한 [[도사 번]]과 [[사쓰마 번]]의 서양선박구입 단가가 막부나 다른 번에 비하면 상당히 낮다는 점이었다. 도사 번은 군함이 아닌 [[상선]]을 주로 구입했는데 막부의 일반선박 평균 단가보다 30%이상 쌌다. 왜 도사번은 막부나 다른 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배를 구입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해 보면, 도사번이 처음으로 구입한 '난카이마루(南海丸)'는, 요코하마에서 존 만지로가 구입과 교섭을 실시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선중팔책'을 기초한 '유가오(夕顔)'등도 만지로가 고토 쇼지로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구입한 것이다. 사쓰마번도 10척의 구미에서 조달한 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구입하는 데도 번교의 교수로 초빙된 존 만지로가 진력하고 있다. 도사 번과 사쓰마 번은 존 만지로의 영어 실력과 선박에 관한 지식을 활용해 저렴한 가격에 배를 구입한 셈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도사번이 구입한 서양 선박은 군함이 아니라 대부분 상업적인 목적 선박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포경을 중심으로 한 어업력과 해운력을 향상시켜 일본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만지로의 사상이 담겨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가오' 등의 도사 번의 주요 선박은 메이지 신정부 출범 후 [[미쓰비시]]의 설립자이자 만지로의 제자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창설한 해운회사로 이적되어 일본 해운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https://www.spf.org/opri/newsletter/458_3.html?latest=1|#]] 1860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으로 가는 선박 항해에서도 통역사로 동행했다. 당시 쇼군은 워싱턴에 대사를 파견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지난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근대 선박을 운용할 실력을 갖추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선원들 또한 그동안 갈고 닦은 원양 항해술을 직접 실험해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사절단을 간린마루에 태워 태평양을 건너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미국 측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 위험한 실험이었다. 그래서 간린마루호(咸臨丸)는 시험 항해를 하고, 사절 일행은 미국이 제공하는 선박 포해튼(Powhatan)호로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경험이 부족한 선원들이 처음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를 한다고 하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탑승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빈 자리가 남아서 20대의 [[후쿠자와 유키치]]도 군함부교로 꼽사리로 동행하고 있었다. 일본 최초의 태평양 횡단인 이 항해는 오랫동안 일본인만으로 이뤄낸 위업으로 꼽혀 왔었다. '''그러나''' 100년 후인 1960년 미 해군의 존 브루크(John Brooke) 대위의 항해일지가 공개되면서 진실이 밝혀졌다. 간린마루에는 브루크 대위를 포함해 11명의 미 해군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의 일지에는 간린마루의 항해가 극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인 선원들은 겨울철 태평양의 거친 [[파도]]와 [[폭풍]]에 대응할 기술이 없었다. 출항 다음날부터 날씨가 험악해져 난항을 겪얶기 때문이다. 일본 최초 태평양 항해인 이 항해는 통역으로 타고 있던 존 만지로가 미국인 선원들과 함께 '간린마루'를 조종했던 것이다. 위에 적힌 내용과 태평양 횡단을 이끈 실적을 보면 그의 선박 및 항해기술 능력은 서양 열강국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https://www.spf.org/opri/newsletter/458_3.html?latest=1|#]] 참고로 이때의 선장은 [[가쓰 가이슈]]였는데, 배멀미로 드러누웠고, 기술도 부족해서 만지로가 배를 조종했다고 한다. 만지로는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에도 직접 도움을 주며, 사실상의 함장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전부터 항해 경험이 풍부했던 만지로가 배의 운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존 브루크 대위는 만지로의 활약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1860년 2월 5일 존 만지로와 함께 간린마루를 여행한 브루크 대령의 일기에는 "우리 존 만지로가 일본의 개국에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http://inspiringbiographies.blogspot.com/2010/08/john-manjiro-first-japanese-to-reach.html?m=1|#]] >함장은 설사를 일으키고, 제독은 배에 취해 있다. (중략) 일본 해군에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은 선원 중 만지로가 유일하다. (중략) 나는 일본해군의 개혁에 힘쓰겠다. 그리고 만지로를 돕는다. (중략) 만지로는 누구든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지만, 또 동시에 뭔가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매우 위험한 지위에 있으므로 매우 조심해서 균열을 피해야 한다. (중략) 만지로는 나와 함께 왔지만, 다른 일본인들은 너무 느리고, 또 관심이 없어서 덱에 나온 것은 한두 명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선실로 돌아왔다. 곧 만지로가 내려와 모두를 갑판으로 모았다고 보고했으므로 나도 갑판으로 올라가 배를 북동미동으로 향했다. (중략) 만지로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너새니얼) 보디치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중략) 그는 모험정신이 풍부한 사나이다. 나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을 묻겠다. 그는 대단히 이야기를 좋아했고, 일본의 개국에 대해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공로가 많았다는 것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다. >---- >― 존 브루크(John Brooke)의 항해 일지[* 브루크는 이 항해일지에서 만지로를 제외한 모든 일본인 선원들을 까고 있다. 일본인들은 순전히 [[굼벵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ktymtskz.my.coocan.jp/denki2/j16.htm|#]]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nrinmaru.jpg|width=100%]]}}} || || {{{-1 {{{#ffffff ▲ ''' 간린마루(咸臨丸) '''}}}}}} || 이때 만지로는 후쿠자와와 함께 미국의 서점에서 웹스터 [[영어 사전]]을 구입하여 이를 일본에 가져와 [[번역]]하였다. 1866년,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도쿄대학]]의 전신이 되는 가이세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영어, 항해술, 측량술 등을 가르쳤다. 카이세이 학교에서 그는 [[영어]]를 지도해, [[후쿠자와 유키치]]나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등을 가르치는 등, 교육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살렸다. [[메이지 유신]] 이후 새 체제에서도 만지로는 여러 학교의 교수 요원으로, 혹은 해상 사업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 1870년에는 [[보불전쟁]] 시찰단으로 유럽에 파견되었다. 만지로는 이 당시 유럽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워싱턴 D.C.]]에서 정식으로 영접을 받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윗필드 선장을 만나기 위해 그의 고향인 매사추세츠주 페어헤븐으로 육로를 여행했다. 그리고 [[은인]]인 윌리엄 윗필드 선장을 만나게 된다.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고 만지로도 감격한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선장의 부인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1년만의 재회였다. 윗필드 선장은 집에 있는 딸과 세 아들을 만지로에게 소개한다. 이 때 만지로는 선장에게 [[일본도]]를 선물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검은 1977년에 도난당했고, 지금은 몇몇 일본 회사들이 기증한 '대체'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https://millicentlibrary.org/manjiro-2/|#]]] 만지로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곧 알려지면서 다음날 아침 선장 집 앞은 발칵 뒤집혔다. 과거 함께 동문한 반 친구를 비롯해 지인들도 몰려왔다고 한다. 윗필드 선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 날 현지 신문은 만지로의 방문을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에도 막부 말기의 존 만지로의 행적은 미국의 다양한 문물을 소개하고 서양 지식을 흡수하고자 했던 막말의 지사들과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표류는 죽음을 의미했다. 살아 돌아올 확률은 1% 미만이었다. 그러나 만지로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았고 미국 본토에 상륙해 미국식 교육까지 받은 뒤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했다. 일본으로 돌아 온 그는 [[개화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준 [[조타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많은 인물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24살의 청년이었던 [[요시다 쇼인]]은 해외에 갔다왔는데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막부의 벼슬을 얻었다는 존 만지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앞으로 출세하려면 외국의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된 직후, 조각배를 타고 쿠로후네로 찾아가 해외 밀항을 부탁했다가 [[페리 제독]]한테 거절당하고 옥살이를 했고(...)--그 분노로 막부 타도를 외친건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 '[[조슈]] 파이브' [[이토 히로부미]] 등은 번의 공금을 [[횡령]]해서 [[영국]]으로 [[밀항]]을 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이와쿠라 도모미]]의 [[이와쿠라 사절단]]으로도 이어졌다. [[사카모토 료마]][* 상인들의 피를 이어받는 사카모토 료마는 가와다 쇼료를 통해 만지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합리적인 미국의 사고방식에 감동하고 푹 빠지게 된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만지로로부터 전해진 미국의 민주주의 지식은 이타가키에게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사키 야타로, 고토 쇼지로, [[자유주의]] 사상가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일본에서 [[장 자크 루소]]를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 동양의 루소라고 불렸다. 제자로는 [[고토쿠 슈스이]]가 있다.] 등에게도 영향을 줬다. 만지로는 엘리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서구 정치 제도에 대해 논하고, 외교 업무를 돕고, 조선과 해군 창설 등에 직접 간여했다. 또한 그는 봉건체제라는 [[우물 안 개구리]]의 일본인들에게 드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자 역할을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만지로의 지식은 메이지 체제의 중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1889년 [[헌법]]에 반영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존 만지로는 서구인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에 일조했다.[[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1/09/28/MGAH6IGO4BGQDDIGUDMHKEFO3U/|#]] [[미일관계]]에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https://www.bs4.jp/hsi/onair/18.html|#]][[https://www.sankei.com/article/20170403-B2LKRJAO45I2VL5MENAPOB23M4/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